평신도 성경교육 및 신앙훈련/종교개혁 이야기

종교개혁 이야기 7강

Olive J 2020. 11. 28. 07:00

▣ 청교도와 영국의 종교개혁

 

- 청교도(Puritan)란?

 

청교도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부분적인 개혁을 지양하고 칼빈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 철저하고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려고 하였으며 실제로 영국 종교개혁은 물론이고 그 이후의 개혁주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영국 내의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이나 지속적으로 진행된 개신교 종교 개혁운동이며,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청교도라는 말은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적자들에 의해서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 깎는 경멸 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탁월한 경건과 능력은 '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되었다.

 

 

 

 

 

 

- 제임스 1세 -

 

 

 

 

- 청교도 혁명 알아보기

 

영국을 크게 발전시킨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죽자, 왕의 친척이며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1세가 뒤를 이어 스튜어트 왕조를 열었다. 제임스 1세는 일찍이 민주주의에 눈뜬 영국 국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자기 나라에서처럼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제임스 1세보다 더 심하게 전제 정치를 하였다. 그는 의회를 무시하고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국교만을 강요하며 당시 상공 시민들 사이에 퍼져 있던 신교파인 청교도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국민의 기본 권리와 의회의 특권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권리 청원을 제출하였다(1628년). 찰스 1세는 처음에 이를 받아들였으나, 이듬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 정체를 계속하였다. 그 뒤 그는 국교회 정책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미련하려고 다시 의회를 소집하였는데, 이때 의회는 국왕의 전제 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란이 일어났다(1642년). 이 내란은 8년 동인 계속되었는데, 청교도의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왕의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의회는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한 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1649년). 이것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천재학 백과 中>

 

 

 

- 청교도  혁명 배경

 

1. 영국 사회의 변화  : 영국에서는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으로 득을 본 세력은 젠틀리로 불리는 지방 계층들이었다. 이들은 자영농과 귀족의 중간 계급으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의회의 하원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편, 도시에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두 세력 중에서 농촌의 자영농과 함께 칼뱅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가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전제 정치와 국교회 가용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2. 왕권신수설의 신봉 : 왕권신수설은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며, 왕권은 신이 주었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적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믿었으며, 이를 신하들에게도 강요하였고 이에 대해 의회는 반발하였다. 또한 왕은 영국 국교회를, 의회는 청교도를 믿고 있었으며 제임스 1세는 억압적인 전제정치로 의회의 분노를 자극하였다.

 

 

 

3. 전제정치의 강화 : 제임스 1세는 당시 영국의 입헌정치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하고자 하였고 이에 의회와 국왕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아들 찰스 1세 역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전제정치를 펼쳤다. 그는 입헌적 전통을 무시하고 국왕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압적으로 믿게 하였고 이에 국민들은 불만을 가졌다. 일반국민들은 국교를 기피하고 청교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 청교도 혁명 과정

 

스코틀랜드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청교도의 한 분파인 장로교를 믿고 있었는데 왕이 영국 국교회를 믿으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스코틀랜드는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당시 찰스 1세는 이를 막을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11년 만에 의회를 열 수밖에 없었다. 왕과 의회가 다시 만날 때 청교도 혁명이 시작되었다. 무장봉기에 대처할 전비를 마련 후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했다. 그간 독단적으로 정치하였던 것에 불만을 품은 의회는 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와 비판하던 의회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영국 국교회를 믿는 사람은 국왕을 추종하며 청교도들은 의회를 추종했다. 1642년 두 파 사이에 청교도 전쟁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왕당파가 유리했다. 왜냐하면 왕당파에게는 전쟁에서 유리한 기병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이 의회파의 군대를 재조직하면서 전세는 점차 뒤집혀졌다. 거기다 의회 파는 종교적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어 해외 원조를 받기도 쉬웠다. 결국 왕당파와 의회의 전쟁에서 의회파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전쟁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지만 그들은 신앙의 미묘한 차이와 군인과 의원 간 차이 등으로 다시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열하게 되었다.

 

 

 

 

- 올리버 크롬웰 -

 

이 분열을 틈타 찰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왕은 다시 크롬웰이 이끈 군대에 패하였다. 그러면서 크롬웰 대부분 군인인 독립파를 이끌면서 장로파를 몰아내고 의회를 장악하였다. 이후 크롬웰과 독립파는 국왕인 찰스 1세를 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시키고 영국 역사상 최조이자 최후의 공화정을 수립하게 되었다. 크롬웰은 이후 장로 파인 스코틀랜드와 왕당파 세력이 강한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항해조례를 제정하여 영국의 무역활동을 신장시켰으나 공화정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금욕적인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당시 크롬웰의 정치권력은 찰스 1세보다 절대적이었다. 크롬웰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호국경에 취임하였으나 국민들은 더 이상 호국경 정치를 지속시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 찰스 2세 -

 

- 청교도 혁명(영국 혁명) 마무리

 

크롬웰이 죽자 영국 국민들은 금욕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예전 상황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에 찰스 1세의 아들로 프랑스 망명가 있던 찰스 2세가 귀국하면서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부터는 청교도 정신이 억압을 받게 되었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만은 지니고 있었다. 반 국교파 즉 국교(오늘날의 성공회)를 신봉하기를 거부하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검토하며 일단 결정한 신념은 행복과 생명에 대한 위협이 있더라도 끝까지 고수한다는 사람들이 영국인의 우수한 전형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때로는 종교문제에 전념하고 때로는 정치문제에 열중하나 항상 강직, 완고, 청렴하게 행동했다. 노예제도와 전쟁을 반대하는 투쟁을 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근엄한 일요일을 유지해 온 것은 이 사람들이었다. 영국인의 성격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특성 사실 청교도의 특성은 오늘날 미국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왔으니까 일부의 사람들이 혐오하는 특성의 일부는 이들 청교파로 부터 유래한 것이다. 성실과 신용도 특성이며 인간의 성격은 칼빈파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복잡하기 때문에 자기기만이나 위선도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만 모시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악마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신과 악마가 싸우고 있다는 것이 진리일 것이다. 청교도들은 피할 수 없는 자기들의 사악한 신념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건한 이론으로 해명하도록 애썼던 것이다. 그들은 이기적인 이해관계에도 도의적인 가면을 씌우곤 했다.

 

 

 

 

▣ 7강을 마무리하면서

 

 

- <좌> 존 번연 <우> 윌리암 에임스 -

 

 

 

 - 이 시대에 시련을 겪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천로역정' 지은 존 번연입니다. 불법적인 종교집회를 열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서 3개월 징역형을 받습니다. 그가 석방되면 다시는 설교를 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서에 서명을 거절하면서  이 3개월 징역형은 12년 징역형으로 늘리게 됩니다. 그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 글이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로역정입니다. 찰스 2세가 죽자 제임스 2세가 즉위하게 됩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세기가 지난 이후에 가톨릭에 세력들은 영국에서 발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교적 평화롭게 망명길을 떠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으로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이때 군주의 권력이 크게 제한되는데 이를 우혈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전에 종교 통일법은 모두가 폐지되어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실천을 살펴보면 100년 동안 이들은 한 가지 일에 주목하고 몰두했는데 이것이 바로 설교였습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에 특징이 결국 단 한 가지 말씀에 대한 설교로 요약될 수 있다라는 데 동의했습니다. 루터는 '우리는 말씀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설교단이 측면에 위치해 있었는데 청교도들은 이 설교단을 예배당 중앙에 높은 위치에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라고 굳건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 디모데후서 4장 2절 '너는 말씀을 전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늘 그 말씀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많은 설교를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글도 남겼습니다. 청교도들은 단지 말씀을 전하고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삶으로 실천한 자들입니다. 청교도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 모든 관계, 또 모든 활동 속에서 두루 스며든 실천적 신앙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훌륭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에 관심사에 대해서는 청교도주의 신학자인 윌리암 에임스에 「신학의 정수」 라는 책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데 에임스는 신학이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한 교리나 가르침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학이란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삶에 비결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며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라야 말로 가장 수준 높은 삶에 비결이므로 하나님 지향적인 삶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일이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삶은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관심사는 그들의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534년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영국에 사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시민이며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누구나 자동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일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동일한 조건으로 영국 국교회에 주인이 된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사항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사항을 막론하고 언약을 시인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언약을 시인한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고백하고 의에 공로를 붙들어야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성구 다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청교도들은 진심으로 거룩한 공회를 믿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만이 이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삶에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향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공회에 거룩한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악과 그에 따르는 죄책감 또 수치심 이 모든 것이 실제 하며 죄에 대한 용서가 있는 것을 믿으며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했고 부활한 몸을 갖게 될 그날을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이 땅에 새 삶을 순례자의 삶,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가는 여행의 길, 존 번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멸망의 도성에서 하늘의 도성'으로 가는 여행으로 보게 한 것입니다. 이들의 내세에 대한 갈망은 도피주의가 아닌 인생을 즐기고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갈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에도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그들의 삶을 통해서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 쾌락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삶인지를 고민하며 한걸음 한걸음 걸어간 자들입니다. 이들의 노력이 영국의 종교개혁으로 또 신대륙으로 넘어가서 미국에 신앙의 터전을 일구며 오늘날 우리에게 위대한 종교적 유산을 남겨 준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우리는 오늘 하루를 또 이번 한 주를 하나님의 말씀에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향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행되어질것인지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님과 동행하므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