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교육 및 신앙훈련/종교개혁 이야기

종교개혁이야기 6강

Olive J 2020. 11. 21. 07:00

▣ 국교도와 영국의 종교개혁

 

 

-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로부터 시작한다. 영국교회와 영국 국민이 점진적으로 개신교화 하는 과정이었으며, 이 기간은 헨리 8세와 그의 계승자인 에드워드 6세, 메리, 엘리자벳 1세의 전 통치를 말한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 내에서 몇 명의 주도적인 지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정치적 사건들에 연루된 국왕들의 처세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 영국에서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영국국교회로 알려진, 국가가 통제하는 영국교회가 국교가 되었다.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있는 현재의 감독파 교회들은 그 기원을 영국교회에서 찾고 있으며, 감리교 파는 18세기에 영국 국교회의 분파로서 시작되었다.

 

◈ 헨리 8세에 의한 종교개혁

 

- 영국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은 헨리가 캐서린과 이혼하는 문제였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하여 18년의 결혼생활에서 여섯 아이들을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 때 사망하고 유일한 생존자는 메리(Mary) 공주뿐이었다. 국가를 안정시켜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 튜터 왕조로서의 헨리 8세는 캐서린을 통하여 자신의 뒤를 이을 왕자를 얻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질서 정연한 왕위 계승에 의해 보장되는 제국의 평화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아들을 낳을 욕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 헨리 8세는 여왕의 시녀들 가운데 하나이던 앤 볼린(Ann Boleyn)과 사랑에 빠져 캐서린과 이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교회를 자신의 치하에 두고 수장이 되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 헨리 8세는 1534년 의회를 통해 여러 법령을 통과시켰는데, 교황청에 보내는 돈을 금지시키고 모두 주교들을 왕의 지명으로 임명하며, 교황에 대한 순종의 서약과 로마의 허락, 기타 다른 모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결국 1534년 11월에 영국 국교의 독립을 선언하는 수장령(Supreme Act, 국왕 폐하는 마땅히 앵글리칸 교회라 불리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가장 높으시고 유일한 수장이시다)을 발표하였다. 또한 영국 내에서 자신의 수장령을 실현하기 위해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크랜머 대주교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이혼과 앤과의 결혼의 적법함을 공포하였다. 헨리 8세는 또한 성직자들이 로마에 항소할 권한을 금지시키는 권한(항소 제한법)을 의회에 통과시켰다. 교황 클레멘트(Clement ) 7세는 그를 인정해 주지 않고 파문하는 절차를 밟는다. 교황은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이며, 앤과의 결혼은 불법이라고 선언하였다. 1534년 9월에 엘리자벳 공주가 태어나자 의회는 곧 왕위 계승 법(the Act of Succession)을 통과시켜 헨리와 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적법한 왕위 계승자들로 규정하였고 모든 국민들은 이 법안을 추종할 것을 선서해야 함을 의무화시켰다. 또한 다시 왕과 그의 가족들을 반대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반역 법(the Treasons Act)을 통과시킴으로써 튜더 왕조 하에 국교 성립을 체계화시키는 작업이 일단락되었고 영국은 독자적인 수장을 지니게 되었다.

 

- 헨리 8세의 재위 기간 중 교회생활에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째, 종교적 동기 및 반성직자적 정신에 경제적 필요성까지 복합되어 헨리 8세는 과거의 수도원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압류하였다. 수도원 폐쇄의 외형적인 이유는 수도원의 타락이지만, 내적인 이유는 재정적 문제 때문이었다. 왕실은 수도원을 압류하여 상당한 재산을 취득하였고, 대부분 돈을 받고 개인들에게 판매하였다. 둘째, 교회에 일상생활의 통용어로 된 성경을 비치하는 문제였다. 크랜머는 영어 성경 출판을 지원하고 영어로 된 기도문을 작성하였다.

 

- 1539년 6월 의회를 통해 헨리 8세는 6개 신조(Six Articles Act)을 반포하였다. 화체설의 교리를 영국의 신조로 확정하여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화형에 처했다.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시켰고,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의 이종 배수를 반대(빵만 분급) 하였고, 순결 서약을 엄격히 지킬 것을 명했고, 개인 미사와 비밀 참회를 권장했다. " 6개의 현을 가진 피의 채찍"으로 알려진 이 법령은 헨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효했다.

 

 

 

 

- <좌> 헨리 8세 <우> 캐서린 -

 

 

◈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 크랜머는 루터의 영향을 받은 온건한 성향의 인물이었고, 헨리 8세는 영국적 종교개혁의 과정을 책임질 사람으로 토마스 크랜머를 임명했다. 크랜머는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헨리 8세는 영국교회의 제도나 교리를 새롭게 제정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헨리 8세의 가장 큰 관심은 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크랜머도 신앙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도원 폐쇄에 앞장섰다.

 

- 크랜머의 개혁 작업중에서 분명히 높이 평가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국 종교개혁이 성경에 근거를 두도록 이끌었다. 16세기 초 성경의 영역(英譯)을 시도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크랜머를 윌리엄 틴데일의 제자였던 커버데일에게 영국교회가 사용할 새로운 성경 번역을 부탁했다. 그것이 바로 '대성경'(The Great Bible, 킹 제임스 성경 번역본의 토대가 됨)이다.  이 성경의 서문을 그가 직접 썼는데, 그 일부에 이런 말이 나온다.

 

"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우겠다.

  어리석음을 꾸짖어야 한다면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스스로 찾아보겠다,

  수정해야 하고, 정정해야 할 어떤 것이 있다면,

  그리고 권고나 위로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으로 잘 배울 것이다.

  성경 안에만 영혼의 살찐 초장이 있다 "

 

- 크랜머는 이 성경을 교회의 눈에 띄는 장소마다 비치해 신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크랜머의 많은 개혁 작업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루터나 칼빈과 같은 호평을 받지 못한 것은 그가 지진 여러 가지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헨리 8세를 교회의 머리로 만드는 작업(수장령)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이후 왕실의 잘못에 눈을 감아버리고 때로는 그것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헨리 8세는 이후 무려 다섯 번이나 이혼해 모두 6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과정에서 크랜머는 왕의 결정을 아무 비판 없이 승인했던 것이다.

 

- 왕실의 힘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펴쳐 나가려던 그에게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에드워드 6세가 6년 만에 병사하고, 에드워드의 이복 누이인 메리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영국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면 서다. 메리는 헨리 8세와 이혼한 캐서린의 딸이었으므로, 영국교회가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해야만 자기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고 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추진한 개혁 작업을 탄압했고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복귀시키고자 했다.

 

- 메리 여왕은 크랜머의 주교직과 사제직을 박탈했고 그를 처형하기 직전, 사면을 미끼로 크랜머에게 자신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는 한 편, 크랜머 자신의 과거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크랜머는 메리의 강요에 못 이겨 철회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크랜머는 교황의 법정에 소화돼 이단 혐의로 고발됐고 본인도 공개적인 화형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형 직전 공개적인 철회 성명을 내 오록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다. 이를 통해 여황의 사면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철회를 취소하여 소신을 지켰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였다.

 

" 이러한 철회 성명은 내 맘 속에 진정으로 믿고 있는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 단지 죽음의 공포 때문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들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써야만 했던 나의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그래서 나는 내가 화형에 처해질 때 그 손을 먼저 태울 것입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반 그리스도적이기 때문에 그의 잘못된 모든 교리를 나는 거부합니다."

 

- 크랜머는 화형장에서 결국 자신의 오른손을 먼저 내밀었고 그 손이 다 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화염에 자기 몸을 맡겼다. 운명의 순간, 그는 스데반처럼 크게 외쳤다.

 

" 주 예수시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 <좌> 순교자 토마스 크랜머 <우> 화형장소 -

 

 

 

 

◈ 에드워드 6세 (r. 1547-1553)

 

- 헨리 8세와 제인 시무어(Jane Seymour 1509-1537)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10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계승하였다. 에드워드 6세 통치기간 중 종교개혁은 외교 정책에 의해서보다는 사회적, 국내적 문제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1551년에는 6개 조항이 폐지되고 42개 조항으로 대체되었는데, 그것은 점점 증가하는 칼뱅주의의 영향력을 반영한 것이었다. 게다가 영국의 성직자들은 이제 결혼이 허용되었다. 신교적 사상들이 영국교회의 예배에서 표현되었는데,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1549년판 기도서(1553년에 개정됨)가 그것으로 당당한 영어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 <좌> 에드워드 <중> 헨리 8세 <우> 메리 -

 

 

[ 간단 요약 ]

* 1547년 헨리 8세 서거.

* 아들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6세로 즉위 - 영국의 요시야라는 별명을 가짐.

* 크랜머 종교개혁 단행.
     공동 기도서, 42개조 신앙고백서, 설교문 작성.

* 1553년 에드워드6세 서거.


 

 

 

 

◈ 메리(Mary 1553-1558)

 

- 에드워드 6세가 죽고나자 헨리 8세와 캐서린의 딸인 메리 여왕이 어머니의 한을 풀기 위해 가톨릭 신앙으로  복구시키려고 하였다. 박탈당한 교회의 재산을 환원시키고 수도원들을 복귀시키고자 노력했으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의 정권 아래 투옥되었거나 망명했던 가톨릭 신자들을 다시 고위직으로 복직시켰고, 반대로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지도자들은 투옥되거나 망명을 갔다. 메리의 제2국회는 1529년 이후 교황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발표되었던 모든 법령들을 무효화시켰다.

 

- 당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 국왕이었던 필립 2세와 결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백성들을 격분시켰다. 메리는 영국의 신교도들을 박해했다. 그녀의 통치기간 중 약 300명이 화형을 당하였고 메리여왕은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희생자들 중에는 전직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의 마지막 고백과 순교는 영국을 다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피의 메리여왕-

 

[요약]

* 1554년 헨리 8세의 딸 메리 즉위 -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 피의 메리로 불림.

* 크랜머와 추종자를 감옥 갇히거나 화형, 참수형을 강행. 

* 1558년 메리 서거.
  메리의 공포정치 막을 내림.

 

 

 

 

◈ 엘리자베스 1세(r. 1558-1603)

 

-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종교적 불화가 국가의 통일성에 미치는 영향을 염려하여, 그녀는 국민들 대다수를 만족시킬 종교적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1559년에 의회는 신 수장령을 통과시켰는데, 그것은 메리 여왕 시절의 친 가톨릭적 법안들을 폐지하고 다시 한번 국왕을 영국 국교회의 수장으로 삼는 것이었다. 1559년의 통일령(Act of Uniformity)은 1553년의 개정판 기도서를 채택하였고,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 1563년 의회는 39개조항으로 영국 국교회의 교의를 명확히 하였다. 교회는 대체로 신교적이었던 반면에, 여전히 주교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 치하의 종교적 해결책은 가능한 한 많은 백성들을 결속시키기 위하여 타협과 자구의 애매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가 사망했을 때에는 영국은 신교 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있었다.

 

 

[요약]

* 1558년 엘리자베스 1세 즉위.

* 1559년 또 다른 수장령 서명.

* 크랜머의 공동기도문 복권.

* 크랜머의 42개조 신앙고백서에서 3개 항을 삭제하고 39개 조 신앙고백서 채택.

* 1547년 설교문 작성 : 5편, 7편으로 구성

"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선행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값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작정이다.... 우리가 선행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죄 사함을 얻는다는 말보다 더 이해하기 쉬운 말이 어디 있는가?


* 이신칭의 강조

 

 

 

 

 

- 엘리자베스 1세 -

 

 

 

▣ 6강의 마무리 요약

 

- 영국 종교개혁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어떤 탁월한 종교적 지도자들을 즉 루터, 츠빙글리, 칼빈, 녹스 같은 인물들을 배출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영국 종교개혁에서는 엘리자베스의 통치 이전에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상당한 영적 각성도 나타나지 않았다. 즉, 종교적 성향이 비교적 강했던 대륙의 종교개혁과는 대조적으로 위클리프 주의나 반성직 주의와 같은 종교적 영향럭과 인문주의의 영향 그리고 왕위 계승 문제 등의 정치적 영행력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 정책적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서 추진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통치자의 입장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보이고, 로마교회의 지배권에 대한 정치적이며 국가적인 반대 운동의 형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 속에서 개신교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고, 핍박과 억압 속에서 신앙의 싹은 자라났다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의 시기를 지나,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이르러 나타난 포괄주의 정책으로 인해 영국 성공회의 성격이 규정되었는데, 교회 의식은 로마 가톨릭식, 신학적 배경은 칼빈주의 등 대륙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 아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종교개혁의 중도주의(Via Media)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로 전환하는 동안 영국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써 존재했다. 이런 중도주의적 교리 형성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영국의 종교개혁을 충분치 않은 개혁으로 느끼게 했으며 이것이 청교도 혁명의 계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중도주의적 입장은 영국의 교회가를 통해 이어졌으며 그것을 18세기 웨슬리의 구원론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 영국국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