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교육 및 신앙훈련/종교개혁 이야기

종교개혁이야기 5강

Olive J 2020. 11. 14. 07:00

" 존 칼빈과 스위스의 종교개혁 "

 

▣ 존 칼빈 (1509년-1564년)

 

 

- 존 칼빈 -

 

 

-[유년기]-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마일가량 떨어진 노용(Noyon) 시(市)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노용(Noyon)에 서 14살 때까지 살며 지방학교에서 열심 있는 학생으로서 관심 있는 학과를 빠른 속도로 정복해 나갔고, 친구들로부터 같은 동료라기보다는 선생님으로 생각될 정도의 감탄과 칭찬의 말을 들었다. 한번 만난 사람과 한번 배운 학과는 모두 기억하는 비상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던 그는 우뚝 솟은 성당의 영향력 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경건 생활을 하였던 것은 그의 부모의 영광이었다. 1523년 존 칼빈은 파리로 가서 마르세대학에 등록하여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 교수에게 라킨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을 배우다가 그해 겨울에 몽테규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코디어 교수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유효하게 쓰임 받을 훌륭한 준비였다. 몽테규 대학으로 간 칼빈은 그곳에서 금욕주의의 학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장기간 공부하는 습관 늘 익히고 논변 술과 논박 법을 배웠다. 1509년 7월 10일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약 60마일가량 떨어진 노용(Noyon) 시(市)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노용(Noyon)에서 14살 때까지 살며 지방학교에서 열심 있는 학생으로서 관심 있는 학과를 빠른 속도로 정복해 나갔고, 친구들로부터 같은 동료라기보다는 선생님으로 생각될 정도의 감탄과 칭찬의 말을 들었다. 한번 만난 사람과 한번 배운 학과는 모두 기억하는 비상한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던 그는 우뚝 솟은 성당의 영향력 아래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경건 생활을 하였던 것은 그의 부모의 영광이었다. 1523년 존 칼빈은 파리로 가서 마르세대학에 등록하여 마두린 코디어(Mathurin Cordier) 교수에게 라킨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을 배우다가 그해 겨울에 몽테규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코디어 교수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후일에 하나님의 교회에 유효하게 쓰임 받을 훌륭한 준비였다. 몽테규 대학으로 간 칼빈은 그곳에서 금욕주의의 학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장기간 공부하는 습관 늘 익히고 논변 술과 논박 법을 배웠다.  

 

 

 

- 칼빈 생가 (프랑스 노용) -

 

 

- [청년기] -파리의 대학에서 5년의 훈련을 마친 뒤 1528년 칼빈은 신학연구자격시험에 통과하였으나, 그의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법조계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신학의 길을 아예 자른 것은 아니다.) 오르레안대학의 피터 타아 잔 문하에서 법학을 약 1년간 배웠으나 그는 부르지 대학에서 강의하던 안드레아 일키아티 교수의 명성을 듣고 부르지 대학으로 옮긴 수 멜케오어 볼마르 문하에서 강의하던 그의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칼빈은 볼마르 교수의 교육(언어, 문화, 고대문화연구, 신약 원문 연구) 아래서 조직적인 개혁 수행하고 주석을 쓸 수 있는 기초를 잡은 것이다.

1931년 파리의 왕립대학은 성경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연구되었다. 법학을 권유하던 칼빈의 아버지는 그해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에 칼빈은 파리로 돌아가 왕립대학에서 헬라어, 히브리어 공부를 하였다. 또한 그는 1932년 그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를 출판하기로 했다. 인도주의적 색깔을 강하게 띄던 칼빈은 1532년 오르레안으로 갔다가 (학업을 위해) 이듬해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 그는 프로테스탄테였다. 1532년에 그는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였다. 그는 즉시 복음 사역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가로서 도가지 사명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다. 칼빈은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을 위하여 프로탄테스트 선언문을 쓰고 난 후 힐책과 비난으로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은 앙굴렘(Angoulem)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기독교강요"의 체계를 세워 나갔다.

 

 

 

- [ 사역기 ] -

 

1. 기독교강요 - 1536년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프랑스의 신교들들의 박해에 대한 탄원서로서 프란시스 1세에 보내는 글로 썼다. 그긔 글은 조직적이고 질서와 논리가 정연한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로 개혁교회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된 것을 그 책의 성경에 대한 충실성 때문이다.

 

2. 제네바 개혁운동 - 하나님의 섭리 속에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지도자 화렐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화렐의 "요나의 비유"를 통한 설득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극도로 타락한 제네바에 머물게 된 칼빈은 이름 없는 종교 개혁가로서 종교개혁의 첫발을 내디뎠다. 1536년 로잔에서 신교화 구교 사이에 성찬 문제로 토론회가 있을 때 칼빈은 교부 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여 신교의 주장이 성경적임을 갈파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537년 제네바시의 소의회와 2백인 회의에서 그의 '요리문답'을 정식 채택되었고 아이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은 칼빈의 신앙 요리 문답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시민들을 그를 이단으로 몰아갔고, 개혁자들은 끝까지 신앙고백을 강행하려다가 시정부와 충돌하게 되었다. 습격, 협박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시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과 화렐은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3. 스트라스 버그 - 칼빈은 바젤(Basel)로 갔다가 1538년 9월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신학을 강의하였으며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그는 스트라스 버그에서 약 3년간 있으면서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시기에 그는 결혼도 하였으며 기독교강요 제2판도 내었다. 분주한 가운데 행복했던 칼빈에 비하여 제네바는 반대였다. 1540년경 반대파의 세력이 약해지고 부패는 더하여져서 제네바시는 칼빈을 재초청하였다. 칼빈은 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동역자 화렐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1541년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 스트라스 부르그 부끌리에 교회 -

 

 

 

4. 다시 제네바로 -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시의 전권을 장학하게 되자 그의 개혁 이상을 실현하기에 노력하였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처음 행한 일은 시의회에 나가 법에 의지하여 교회를 다스릴 것과 교회법규를 제정할 것,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에게 시 위원회의 고문 위치를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회 법규"가 1541년에 대중 앞에 낭독되고 정부와 시민에 의해 채택되었다. 하지만 1543년 시의회는 장로원으로부터 제명권을 박탈하고 1548년에는 칼빈의 모든 책은 출판 전에 검열을 받도록 규정하였다. 1553년 추방을 각오하고 사실상 교회에 작별을 고하는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계속된 투쟁은 1553년 말 칼빈의 적수 세르베투스(Servetus)의 죽음으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세르베투스를 지지하던 자유파의 많은 지도자들은 제네바를 등지고 도망하였다. 장로원은 제명권을 찾았으며 그 결과 징계권 행사에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엄밀히 분리되었다.

 

 

 

- 제네바 성 피에르 교회 -

 

 

- [ 노년기 ] - 1559년은 칼빈으로서 성취의 해였다. 제네바시가 그에게 시민권을 줌으로 경의를 표한 것 보다 더 가치를 준 것은 그가 학술원(Accdemy) 설립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교육받은 지도자를 교회에 공급하고자 했던 칼빈의 꿈이 실현된 것이다. 그는 건강아 아주 나쁨에도 불구하고 연 200회의 강의와 200회의 설교를 하였다. 성경 각권을 주석하였고 '기독교강요'를 계속 재편집하며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제작 전집은 총 59권에 달한다고 한다.

1564년 그의 건강은 기울기 시작해서 그해 2월 마지막 강의와 마지막 설교를 하고 4월 마지막 예배에 참석하며, 성찬에 참여 한 뒤, 1564년 5월27일 칼빈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칼빈의 서거 소식은 제네바를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칼빈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은 아주 간고하게 치러졌으며, 그의 무덤 역시 비석 하나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소나무 곁에 묻혀 있을 뿐이다.

 

 

 

 

- 존 칼빈 무덤 -

 

 

 

▣ 칼빈의 업적

 

- 찬양은 시편만 인정

 

- 참된 교회는 증거가 있으며, 그 증거는 말씀에 대한 설교이다.

 

- 교회 문 걸어 잠그기 : 세상 속에 교회가 있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직업에 대해 소명의식으로 바꿈.

 

 

 

▣ 칼빈주의 5대 교리

 

- T=total depravity  전적부패 : 인간 본성의 전적이고 보편적으로 타락했다.

 

- U=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 :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피조물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탕으로 한다.

 

- L=limited atonement 제한 속도 :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구원을 제공하거나 사람들이 구원은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구원을 보증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 I= irreso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혜 : 각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좌절될 수 없다.

 

- P= pre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 택함 받은 성도는 언제가 영화롭게 될 것이며,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 5강을 마치며.......

 

앞에서 우리는 프랑스 신학자이자 교회정치가이고 또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서양의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공헌했던 사상가였던 칼빈의 생애를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다. 칼빈의 사상의 복합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 결국 그 자신의 시대에 그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 그 운동이 성공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있던 후의 세기들에 그 운동이 지속된 것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후의 칼빈주의자들은 그에게서 이 불안정한 혼합을 상속했다. 대립적이고 변화하는 충돌들 사이의 불확실한 균형인 칼빈주의는 중세 후기 교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철저하게 와해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이 흔들림 없고 검소한 생활 하도록 생활 규범으로 제시하여 권면하고 교훈한다. 또 신학적 측면에 있어서 칼빈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역사의식을 보여 주었다. 그는 교부들의 기독론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니케아 회의와 칼 케톤 회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었다. 너무나 많은 오늘날의 신학도들은 역사적 계류가 결핍되어 있다. 칼빈은 기독교 교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얻을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