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알아보기/예레미야

예레미야 안내

Olive J 2020. 9. 6. 07:00
-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한 사람이다(예레미야 1장 1절). 그는 젊은 나이에 부름을 받았으며(예레미야 1장 6절), 그의 사역은 요시야 왕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예레미야 1장 2절, 25장 3절) 예루살렘이 훼파될 때(BC 586)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은 유다의 마지막 다섯 왕(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의 통치 기간 동안이었다(예레미야 1장 3절).

 

- 예레미야의 출생 배경 : 그가 태어난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5km쯤 떨어져 있는 마을로, 크게 보면 예루살렘의 변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던 곳으로(역대상 6장 60절), 제사장 가문인 예레미야가 이곳에 살게 된 이유는 구약의 한 사건과 관계되어 있다. 즉 실로의 제사장 엘리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비아달이 솔로몬 왕 때에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아도니야의 음모와 연루되어 그 출신지 아나돗으로 쫓겨나는 사건이었다(열왕기상 2장 26절).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쫓겨난 제사장의 후예라는 그의 신분은 곧 제사장으로서 예루살렘에 가까운 마을에 살기는 했지만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는 어려웠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로부터 따돌림과 멸시를 받았을 것이다.

 

 

- 예레미야는 매국노였나?  예루살렘 멸망 후 바벨론 왕은 그다랴를 유다의 총독으로 세웠지만(예레미야 40장 7절), 그다랴는 얼마 되지 않아 이스마엘에게 살해당했다(예레미야 41장 2절). 이스마엘은 이 반역 사건을 안 군대장과 요하난의 추격을 받아 암몬으로 도망치고 반역에 대한 책임추궁을 당할까 두려워진 요하난은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려했다(예레미야 41장 16-18절). 그때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예레미야 42장 1-3절), 그가 말하는 주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남아 있으면서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백성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면 바벨론 왕이 땅을 돌려주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재앙이 내려질 것이라고 전했다(예레미야 42장 1-22절).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워 줄 수 있는 건 애굽 뿐이라고 믿으며 의지하려는 백성들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외치는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 예레미야의 성격과 사역 :  예레미야를 가리켜 종종'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른다. 자기 백성을 벌하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과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 백성 사이에 서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예언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 하리로다'(예레미야 9장 1절). 어떤 이들은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인물이 예레미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마태복음 16장 14절). 그런데 예레미야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한편(예레미야 15장 10절, 20장 14-18절), 그가 당한 치욕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했다(예레미야 20장 7-10절). 심지어 자신을 괴롭혔던 자들에게 재난이 임하기를 기도하기도 했다(예레미야 18장 21-23절).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는 감정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면과 함께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끈질긴 면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부도덕과 타락을 외면한 체 낙관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예레미야 6장 14절), 그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과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하고 유대 백성들이 포로로 사로 잡혀 갈 것을 예언했다(예레미야 1장 14-16절)

 

 

-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 :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그의 가슴속에서만 담아 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장 8-9절)라고 했으며,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예레미야 23장 9절)고 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은 그에게 있어 바위를 깨뜨리는 망치와 같았으며, 짚단을 사르는 불길 같은 것이었다(예레미야 23장 29절). 그가 갖은 비난과 모진 수난 속에서도 굳건히 여호와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이름으로 말하도록 보내셨다는 사실이었다(예레미야 26장 12, 16절).

 

 

-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 : 예레미야를 부르신 하나님은 그에게 결혼하지 말고 자녀도 낳지 말라고 하셨다(예레미야 16장 2절). 결혼 금지 메시지엔 예루살렘 멸망의 확실성을 분명히 알리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결혼을 하나님의 복 중 하나로 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잠언 18장 22절) 결혼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러한 복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결혼 금지 메시지는 다가올 심판과 환난을 준비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바울도 환난의 때를 대비하여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좋다고 권면하셨다(고린도전서 7장 26절). 한편 자녀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계속 이어간다고 여긴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을 통해 자녀를 두는 것을 하나님의 굉장한 복으로 생각하였다(창세기 22장 17절, 시편 127편 305절).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녀를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을 전쟁에 나가 죽는 심판과 징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 예레미야가 당한 고난 : 예레미야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로 인해 많은 고초와 박해를 당했다. 그는 결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행복마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포기해야 했으며(예레미야 16장 2절),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배척받는 깊은 고독과 고립을 견뎌야 했다(예레미야 15장 17,19절).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성전의 유사장에 의해 매를 맞고 감금을 당했으며(예레미야 20장 2-3절), 옥에 갇히는 수난도 당했다(예레미야 32장 2절). 때로는 동족을 배반하고 선동하고 탈주했다는 비난과(예레미야 26장, 37장 11-17절), 음해를 받았으며(예레미야 18장 18절, 12장 6절), 구덩이에 갇히고(예레미야 38장 1-13절), 시위대 뜰에 갇히기도 했다(예레미야 38:14-28절).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그는 가난한 하층민들과 함께 유다에 머물도록 허락받았지만(예레미야 35장 11-14절) 바벨론에서 세운 총독 그다랴가 살해되자 예레미야는 강제로 애굽으로 끌려갔다(예레미야 43장 1-7절).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사망 연대는 알 수가 없다.

 

 

- 저 자 :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 본서 1장1절, 36장1,2절에 나오는 내용과 역대하 36장21절, 에스라 1장1절, 다니엘 9장2절의 증거가 이 책의 저자가 예레미야임을 뒷받침해 준다. 본서의 대부분은 예레미야의 제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인 서기관 바룩이 대필하였다(36장4절).


- 기록 연대 :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연대인 요시야 왕13년, 즉 B.C.627년경부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B.C.586년경 직후까지의 기간에 기록되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가 몰락해 가는 쇠퇴기, 즉 유다 역사의 마지막 40여년 동안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며 선지 활동을 하였다.


- 핵심 주제 : 1. 하나님의 통치    2. 죄와 심판    3. 소망


- 내 용 :  예레미야의 소명   /  유다에 대한 경고와 권면  /  핍박받는 예레미야  /  예루살렘 함락 당시의 사건들  /   열방에 대한 심판  /   예루살렘 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