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어 본문의 전통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서로 관련되는 하나의 두루마리이다. 그리스어 역본(칠십 인 역본)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서도 이 두 책은 하나로만 되어 있고, 히에로니무스(제롬)도 라틴어 역본(불가타)에서 <느헤미야>를 <제2 에스라>라고 불렀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것이 두 권으로 나누어진 것은 1448년의 한 필사본에서 처음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권이 <역대상>, <역대하>와 함께 하나의 공통된 '역대기 역사서'를 이룬다(역대기 '안내' 참조)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 <에스라>, <느헤미야>의 역사적인 틀을 전체적으로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뒤이어 상당수 주민들이 사로잡혀 감으로써 유다 왕국은 몰락한다. 거의 50년 후인 539년에 바사 임금 고레스가 바벨론 제국을 굴복시킨다. 바사 사람들은 관대한 종교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대왕과 제국의 안녕을 위해 모든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에스라 6장 10절 참조). 이리하여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주전 538년에 첫 유대인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거기서 성전을 다시 지었다. 에스라 1-6장이 이에 대해 알려준다.
- 그 뒤로 한 80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유대인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지도자는 제사장이자 '학사'인 에스라였는데,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1세(주전 464-424년)의 위탁을 받아서 규정에 맞게 제사드리는 일을 돌보고 또 백성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게 하려고 한다. 에스라의 특별한 관심을 유대인들이 이방 종교를 믿는 주민들과 혼인하는 것을 막아서 하나님 백성의 정결함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에스라 7-10장이 이런 여러 사건에 대해 알려준다.
- 에스라가 이주한 뒤 13년이 지나서 바사 임금은 자신의 왕궁 고위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인 유대인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고 그에게 유대 총독의 전권을 준다. 에스라가 예배 생활과 올바른 질서를 재건해 나갔듯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외적인 재건, 특히 성벽 재건에 힘썼다. 느헤미야 1-7장이 이에 대해 알려준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함께 일련의 개혁 정책을 수행하여 그 땅에 새로운 안정을 이룩하는데, 느헤미야 8-13장이 이에 대해 알려준다.
-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는 이미 있던 옛 명단들을 이끌어 쓰는데, <에스라>에서는 바사 왕궁과 지방 행정 당국 사이에 오고 간 공적인 여러 편지도 이끌어 쓴다. 이 편지들은 아람어로 되어 있다. 삼인칭 본문들도 있다. 그것이 언제나 에스라와 느헤미야 두 주인공의 개인적인 기록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이는 옛날의 역사 서술에서는 인칭의 변화가 하나의 표현방식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 형식으로 된 느헤미야의 진술들(느헤미야 1장 1절-7장 3절과 13장)은 개인적인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어서, 본디는 '회고록'이던 것을 나중에 역대기 역사가가 자기의 역사서 안에 받아들였다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관주 · 해설>>中 -
- 저자 :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스라가 본서를 기록했다고 한다. 본서에는 주어가 1인칭과 3인칭으로 나타나고 있는 까닭에(7장 28절, 10장 1절), 에스라의 저작 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서의 대부분을 에스라가 저술했다는 점에 대해서 학자들은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신앙의 개혁을 주도했다.
- 기록 연대 :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때가 B.C.458년이었고, 3차로 귀환했던 느헤미야가 바사로 소환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때가 B.C.432년으로 추정되는 점으로 보아, 그 사이에 본서가 기록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 핵심 주제 : 1. 하나님의 신실하심 2. 성전 재건 3. 말씀을 통한 회복
- 내용 : 포로 귀환 / 성전 재건 / 에스라의 귀환 / 유대인들의 범죄와 에스라의 회개 / 에스라의 신앙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