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알아보기/열왕기 하

열왕기하 안내

Olive J 2020. 8. 26. 23:30
- <열왕기하>는 <열왕기상>에 곧바로 이어진다. <열왕기하>의 첫 부분에서는 주전 9세기 중반부터 북왕국이 멸망한 주전 722년까지 이르는 유다 및 이스라엘 두왕 국의 역사를 다룬다. 둘째 부분이자 중심 부분에서는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파괴된 주전 587년까지 이르는 남왕국의 역사가 나온다. 첫 부분에서는 북왕국의 역사와 예언자 엘리야가 정치 및 일반 영역에서 활동한 이야기기 한데 어우러지는데,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예언자 공동체의 다양한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다.

 

- 이 무리들에게 자극받아 일어난 예후의 반란(주전 845년)은 오므리 왕조의 바알 숭배를 끝장낸다(10장). 예후는 주전 747년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여로보암 2세(주전 787-747년) 같은 아주 중요한 인물을 배출한 왕조를 세웠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릴 때 경제가 전성기에 이르렀으나 이것이 사회 불의를 불러일으켜 예언자 아모스(<아모스> '안내')에게 질타당한다. 살룸이 예후 왕저의 마지막 임금으로 없앤 뒤부터 북왕국에서는 정권 탈취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15장 8-13절). 이때를 전후해서 북왕국에 출현한 예언자 호세아의 말은(<호세아> '안내') 수소 우상을 섬기는 국가 종교의식과 아울러 가나안 바알 종교의 영향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준다.

 

- 어지러운 국내 정치 상황에 덧붙여 밖으로는 디글랏 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때부터 그 손길을 수리아 팔레스티나까지 뻗치던 신 앗수르 제국이 북왕국을 위협해 왔다. 이미 주전 733년 에 북 이스라엘은 많은 땅을 앗수르에 넘겨주어야 했고, 주전 722년에 사르곤 2세에게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써 나머지 땅을 앗수르의 세력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북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앗수르의 한지방으로 편입된다. 상류층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방 족속들의 상류층 사람들이 이주해 들어온다(17장 1-6절, 24장 41절).

 

- 신명기 역사서('안내'를 보라)에서는 이 대참사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신들에게로 향한 데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 여긴다(17장 7-23절).  이처럼 어려움이 많았던 북왕국의 역사와는 달리 남왕국 유다는 내적인 위기를 거의 겪지 않는다. 그렇지만 앗수르의 위협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앗수르 대왕을 군주로 모셔야 했다. 유다는 앗수르의 봉신 국가로 된 것이다.

 

- 사마리아가 앗수르 사람들에게 함락될 때 남왕국을 다스리던 사람은 유다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들 가운데 하나인 히스기야(주전 725-697년)인데, 그는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이방 요소들을 말끔히 없애버린다(18장 1-8절). 그렇지만 히스기야도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이에 앗수르의 대왕 산헤립은 주전 701년에 수리아 팔레스티나를 정벌하러 온다. 산헤립은 유다의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에워싼다. 히스기야는 매우 많은 공물을 바치고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18장 13-16절). 현실 정치 상황은 신명기 역사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아주 어려운 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신뢰한 임금으로 묘사된다(18장 17-19장 37절).

 

- 히스기야 다음 임금이 므낫세(주전699-643년)인데, 므낫세는 앗수르의 충성스런 봉신으로 처신한다. 므낫세는 앗수르의 국가 종교의식을 예루살렘 성전에 받아들이고 이 때문에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호되게 질책당한다. 마침내는 나중에 유다가 망한 것을 므낫세의 책임으로 돌린다(24장 3-4절).

 

-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주전 639-609년)는 유다가 국가로서 마지막으로 잠시나마 번영하는데 이바지할 기회를 얻는다. 앗수르바니팔이 죽은(주전 633년) 뒤로 앗수르 세력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 그에게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요시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전 북왕국 영토의 일부를 점령하여 이를 유다 왕국에 병합하였다. 요시야의 꿈은 다윗 왕국의 재건이었다. 요시야의 통치기간에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율법책(<신명기> '안내' 참조)의 발견인데, 이 책을 토대로 하여 요시야는 여호와와 새롭게 언약을 맺고 철저한 종교개혁을 해낸다(22-23장). 주전 609년에 애굽의 바로느고가 북쪽을 목표로 하여 팔레스티나를 지나갈 때 요시야는 당시의 정세를 오판하고 느고 와 맞선다. 이 작전에서 요시야는 목숨을 잃고(23장 28-30절), 요시야가 죽음으로써 개혁 사업도 실패로 끝난다.

 

- 이제 유다의 멸망은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유다는 잠시 애굽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가, 곧바로 신 바벨론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여호야김 임금(주전 608-598년)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2세를 배반하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다. 여호야김의 후계자 여호야긴은 석 달 밖에 임금 노릇을 못하고 항복하여 다른 많은 예루살렘 상류층 사람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야 했다. 이렇게 사로잡혀간 사람들 중에는 바벨론에서 예언자로 부름 받게 되는 에스겔도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왕가의 방계 출신인 시드기야를 새 임금으로 세운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경고했는데도 시드기야가 바벨론에게 저항하고, 이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에워싸다가 주전 587년에 함락한다. 이는 유다 왕국과 다윗 후손의 예루살렘 왕권의 끝을 뜻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아직 남아 있던 상류층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다.

 

- 이 대참사도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유다 임금들이 -몇 사람 두드러진 예외가 있긴 하지만- 우상 숭배한 데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 여긴다(24장 3-4절, 19-20장), 그렇지만 신명기 역사서는 바벨론에 사로잡혀와 살고 있던 유다 임금 여호야긴이 사면을 받았다는 내용(25장 27-30절)으로 끝난다. 이로써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대참사를 넘어서 계속된다는 것을 암시하려 한 듯하다.  이 역사가 실제 어떻게 계속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역대상>, <역대하>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알려주는데, 이 책들은 또 다른 하나의 큰 역사서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관주 · 해설>> 中

 

 

 

- 저자 : 열왕기 상하는 원래 한 권의 책이다. 따라서 열왕기 하의 저자도 열왕기상을 기록한 예레미야 선지자로 보고 있다. 이것은 유대 전승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서를 기록했다고 한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왕의 통치 중반기부터 여호야긴 왕이 석방된 B.C.561년 이후까지 활동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서의 저자였다면 당시 그의 나이는 8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 기록 연대 : 열왕 기하는 열왕기상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열왕기 하의 기록 연대는 열왕기상과 동일한 B.C.561-538년 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핵심 주제 : 1. 하나님과의 신앙적인 관계       2. 철저한 개혁

- 내용 :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  / 엘리사의 사역  / 후기 분열 왕국 시대  / 북이스라엘의 멸망 / 남 유다 왕국 시대   / 남 유다의 멸망